(사진 : 임효진)
무슨 뜻으로 하는 말 🛒

ISBN : 9791189337179
발행일 : 2023.11.03.

반복되는 어느 일요일에 대한 다섯 편의 연작 소설입니다. 다소 무모한 계획과 변덕맞은 선택 속에 조금씩 달라지는 다섯 번의 하루를 사는 동안 주인공이 듣거나 하게 된 말의 진의를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괜찮으세요?
일부러 그랬겠어
팬입니다
혹시 저 뮤트하셨어요?
가만 있어 봐

📃 그렇다, 사진. 오늘의 모든 일정은 공통적으로 사진 촬영이 가장 중요하다. 계획대로 누락없이 수행한다면 최소 네 장의 사진을 건져 업데이트가 뜸했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가능한 일정인가? 말도 안 돼. 고작 사진 때문에 이걸 다 하겠다고? (p.13)

📃 신은 없다. 아니, 어쩌면 있어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나한테 왜, 무슨 가르침을 주려고. 태연하지만 조금 빠르게 걸었다. 다시 보니 삼십 초가 알려 준 곳은 나무와 수풀이 우거져 다들 가까이 하지 않는 곳이었고, 숨어서 이 사태를 처리하기에 제격이었다. (p. 26)

📃 다 할 수도, 필요도 없다.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자는 마음으로 일어났다. 제 집에서 웅크리고 앉아 눈치를 살피고 있던 감자가 나보다 먼저 뛰어가서 싱크대 앞에 앉았다. 빙글빙글 돌다가 그릇을 내려 놓자 사료를 한 알씩 씹어 삼킨다. 너 목욕할 때도 지났는데. 밝을 때 데리고 나가서 산책한 게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감자에 대한 죄책감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기대출금이 십 억 정도라고 쳤을 때, 과연 그는 오십만 원 정도 더 대출 받는 것을 크게 걱정하며 주저할까? 미안하지만 늘 미안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미안할 짓을 할 예정이라는 뜻이다. 가만 있어 봐, 비유를 위한 예시였지만 그 십 억 다 은행에서 받은 거라면 신용등급 한번 끝내준다는 건데 그 사람 누군지 참 부럽군. 10억을 10년 만기, 원리금 균등 상환, 금리 4.5%로 빌렸을 때 다달이 얼마씩 나갈지 계산하면서 머리를 말리던 중에 배가 살짝 부글거렸다. (p.40


📃 마음과 달리 몸은 요지부동이었다. 이윽고 다시 잠들었을 때에는 오염된 바다에서 수영을 하다가 피부병이 생겼고, 온몸의 살이 다 뒤집힌 채 서윤 씨 결혼식에 갔다가 청첩장을 가져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입장을 제한당해 옆 건물 옥상에서 핸드폰 카메라로 여섯 배 줌을 당겨 예식장 내부를 엿보는 꿈을 꿨다. 깨자마자 작은 방으로 가서 책상을 뒤졌다. 내가 청첩장을 어디 뒀더라… (p.66)

📃 털어놓고 싶은데 내 마음이 정확하게 어떤 형편인지 파악조차 힘겨운 상태로 술김에 뱉은 말이었다. 지금이라면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이 사람 귀에 들어가다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진경 씨와는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였다. 그래도 그렇지, 나는 그 자리에서만 들어 주길 바랐다. 쉽게 한 얘기도 아니었다. (p. 81)

📃 거절은 왜 어려운가. 이 또한 부모와의 애착 관계 형성에 문제가 있던 탓일까. 당장 뿌리쳐도 모자랄 사람을 고분고분 따라가는 것도 모자라 카운터 앞 카드 내기 경쟁에서 사력을 다 해 승리한 뒤 계좌의 잔액을 걱정하는 자가 된 걸 오직 부모의 잘못이라고 보긴 어렵지 않나. 뭐가 그렇게 두려운가. 진짜 뮤트한 게 들킬까 봐? 아니면 얻어먹기만 한다고 내 흉볼까 봐? 잠깐,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사람들은 너만큼 너한테 관심이 없어. 신나게 떠들었다 한들 네 얘길 입에 올렸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할 거야. (p. 104)

📃 정상까지 오래 걸리려나 싶을 때 탁 트인 공터가 나왔다. 여기 좀 앉아 있다가 가야지. 생각보다 높은 곳이라 동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감자가 벤치 밑을 발로 긁으면서 킁킁거리길래 봤더니 바람이 다 빠진 고무공이 있었다. 힘껏 던져도 발 앞에 떨어지는 고무공을 가지고 한참 놀다가 어느새 해가 졌다. 공원에서 나오는 길에 감자의 똥까지 수확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제법 만족스러웠다. (p. 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