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시별 지하철 탑승기 시리즈 ‘도시, 선’을 주제로 한 전시가 2020년 2월 11일부터 3월 10일까지 ‘도시,선’ 같이 타기라는 제목으로 땡스북스에서 진행되었다. 쇼윈도에는 <서울, 9개의 선>에서 땡스북스가 위치한 홍대입구역과 합정역 사이가 언급되는 52, 53페이지를 분할 출력하여 부착하였고, 하단의 테이블에는 ‘도시, 선의 희로애락’이라는 이름으로 <서울, 9개의 선> 본문을 발췌하여 기쁜 n호선, 노여운 n호선, 슬픈 n호선, 즐거운 n호선이라는 4가지 카테고리로 나뉜 카드 뒷면에 옮겨 적어 진열하였다. 내부 테이블은 ‘도시, 선 플래너’라는 제목 아래 ‘도시, 선’ 시리즈의 실제 작업 과정을 ‘도시 정하기, 지하철 노선 알아보기, 탑승하기, 지하철 밖 즐기기, 지하철 안팎의 시간 정리하기'라는 다섯 개의 코너로 나눠 소개하고 도서와 무가지를 함께 진열하였다. 전시 4주 차였던 3월 5일에는 ‘그런 얘기는 이번 기회에’라는 제목의 행사도 열렸으며, 전시 기간 동안 하우위아 도서 구매 시 마스킹 테이프 증정 이벤트를 진행하였다.
2.
이 글의 목적은 땡스북스에서 전시를 하다니 그게 얼마나 기쁜 일이었는지 나중에 조금이라도 잊을까 봐 낱낱이 기록해두는 데에 있다. 우선 이번 전시 전에 내가 땡스북스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아보자. 2017년 3월 발행된 <책방산책 서울>에 ‘완성되지 않은 취향으로 말을 거는 곳’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4문단의 글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3년 전 겨울, 팟캐스트 ‘빨간책방’의 두 진행자가 서교동 일대를 걸으며 헉헉대는 숨소리까지 알뜰하게 담아낸 특집이 있었는데, 출판사는 두 곳을 들렀고 서점은 땡스북스 한 곳을 들렀다. 아닌가, 들른 게 아니라 걷는 중에 “여기가 바로 그 땡스북스입니다.” “예,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뭐 이런 식으로 지나갔었나. 두 사람이 땡스북스를 들어갔는지 지나갔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당시 방송을 듣는 내내 그들이 걷는 길을 상상하며 몹시 들뜬 것은 정확하다. 폭발적 상상력으로 서교동을 그려낸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취직과 독립을 동시에 이뤄 갑작스레 상경한 나는 고시텔에 짐을 풀었다. 방의 규모를 모르는 엄마가 싸준 짐은 아무리 풀어도 끝이 없어서 당장 쓸 것들만 꺼내두고 일단 밖으로 나왔다. 여기가 이제 내가 살 동네구나, 라며 느긋하게 둘러보기에 토요일 저녁 8시의 홍대는 굉장히 뜨거웠는데,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향한 곳이 땡스북스였다. 온도차 때문인지 책방 안과 밖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서 ‘홍대’하면 떠오르는 멋쟁이가 아니어도, 책을 좋아하는 마음만 있다면 입장이 허락된 공간 같았다. 디자인 서적과 그래픽노블 서가 앞을 서성이고 있자니 왠지 시각예술에 조예가 깊은 섬세한 감각의 소유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마침 워크룸프레스의 전시가 진행 중이었고 안팎으로 예쁜 책들과 곱지 않은 잔액 사이의 깊은 갈등 끝에 골라온 책 제목은 <꿈>이었다. 말로만 듣던 그 책방에 와있는 것도, 이 책방 한 켠에 진열된 책을 만드는 곳에서 일하게 된 것도, 이런 책방이 있는 동네에서 살게 된 것도 모두 꿈만 같았다. 그 꿈이 흐릿해질 때마다 땡스북스를 찾았다.
잠깐 다른 얘기를 하자면 위의 글을 보낼 때의 제목은 <완성되지 않은 취향으로 걸어온 말>이었는데 담당자였던 김홍구 편집자의 ‘책방이라는 공간에 방점이 찍히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제안 덕분에 <완성되지 않은 취향으로 말을 거는 곳>으로 수정했다. 이 후기를 쓰느라 그때 보냈던 메일을 다시 봤는데, 부족한 글에 꼭 필요한 조언을 해준 것이 다시금 고마웠다. 원래 하려던 얘기로 돌아가서, 땡스북스는 이제 막 서울에 1인 가구를 구성한 내게 이 도시에 살아도 괜찮다는 안정감에 더하여, 이 도시에 가능한 한 오래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한 공간이었다. 당시 합정역 2번 출구 삼성생명 뒤쪽에 위치한 출판사 큐리어스에서 근무했고, 극동방송 뒤에 있던 고시텔에 살았는데 회사와 고시텔을 오가는 길 중간에 땡스북스가 있었다. 마감 기간이 아니면 정시 퇴근이 가능했고 그중 몇 번은 퇴근길에 땡스북스를 들렀다. 회사로 가는 아침에 간판이 보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렀다 갈 수 있는 곳이 땡스북스라는 게 큰 행복이었다.
3.
전시 제안 메일을 받고 ‘정말 잘하고 싶다’는 생각과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웅을 겨루느라 괴로웠다. 너무 잘하고 싶었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전시 준비 기간이 결혼 준비 기간과 겹쳤다. ‘의도치 않게’는 정확한 표현인가, 과연 의도치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일정상 전시 설치일 사흘 전에 상견례를 하는가 하면, 이틀 전에는 드레스를 골라야 했다. 하지만 회사를 다니고 있는 시기도 아니니까 전시와 결혼 준비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좀 더 솔직하게 쓰자면 결혼 준비는 대충해도 굴러갈 것 같았고 전시 준비는 온 힘을 다하고 싶었다. 바람과는 달리 결혼 준비는 대충할 수가 없었다. 전시 기획안을 짜다가 어느새 인스타그램에서 #단발웨딩 같은 것을 검색하는가 하면, 쇼윈도와 테이블에 비치할 희로애락 카드를 자르다가 네이버 검색창에 ‘코로나 결혼식’을 입력하는 식이었다. 이 전시에서 내 작업의 어떤 면을 강조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 한복을 고를 때 두 혼주 사이를 오간 발화의 맥락을 파악하려는 추리에 더 많은 기운이 소진되었다는 변명도 빠질 수 없다.
주변의 도움이 컸다. 신간이라는 이유로 <시카고, 8개의 선>을 메인 도서로 택하고 쇼윈도 벽면에 부착할 스프레드 역시 시카고 본문에서 골랐는데, a.k.a.행비 님께서 손님들 입장에서는 익숙지 않은 지명과 역명이라 이 책이 지하철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도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을 주셔서 메인 도서를 <서울, 9개의 선>으로 바꿨다. ‘애덤스와바시’라는 텍스트와 ‘충정로’라는 텍스트가 불러일으킬 관심의 차이는 우리 집 응암에서 저 두 곳으로 가는 데에 걸리는 시간의 차이만큼 컸고, 바꾸길 천만다행이었다. 일정 관리 능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전시 하루 전에는 집들이를 했는데, 응암역 근처 어느 투룸을 방문한 세 명의 손님들에게 칼과 커팅 매트, 코너 펀치를 쥐여주고는 날이 저물 때까지 일을 시켰다. 다음 날 오전에 출근해야 하는 동거인에게 ‘당신이 지금 자러 간다면 한평생 서운할 거야’라는 표정으로 먼저 자라고 말하며 새벽 세 시까지 칼질을 시켰다. 염치없지만 다들 너무 고맙다.
4.
설치일이자 전시 시작일에는 시간을 잘못 알고 늦게 갔다. 전시 2일 차에는 설치일에 빠트린 쇼윈도 카드와 시트 뒷면의 알록달록한 선들을 보충했고, 3일 차에는 홍콩과 도쿄의 영수증 정리물을 보충했다. 방금 쓴 문장은 전시 3일 차까지 제대로 설치를 마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충이라는 단어로 슬쩍 덮으려는 뻔뻔함의 결과물이다. <그런 얘기는 이번 기회에>라는 제목으로 진행했던 행사는 본문에 담지 못한 작업의 뒷이야기 모음으로 기획하였으나 풀어놓고 보니 가정사 폭로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나야 잠깐 머쓱한 것으로 끝났으나 참석하신 분들은 내내 당혹스럽지 않았을까.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마스크를 쓴 채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송구스럽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했다. 아무도 안 쓸 것 같아서 미리 민망했던 희로애락 카드는 철수 후 손님이 남긴 것들만 따로 세었더니 본문 발췌로 미리 써둔 것보다 많았다.
행사 때 다음 도시는 어디로 생각하냐는 질문을 들었다. 예전에 생각해둔 건 베를린이었는데, 어디든 코로나 때문에 당분간 어려울 것 같다고 대답했던 걸 행사 후 곱씹으면서 그동안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무 일정과 향후 몇 달간의 카드결제 대금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고민 없이 세 번의 비행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짐작도 못 했을 가지각색의 불운이 비껴간 덕분이다. 이번 전시로 구현한 결과물과 별개로, 전시를 준비하느라 ‘도시, 선’ 시리즈 작업을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때 이런 곳도 갔구나. 실제로 본 건 이랬는데 쓴 건 이랬구나. 이런 생각도 했었는데 잊고 있었구나. 최근 2~3년 사이에 내가 그 전과 너무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왜 이렇게 갑자기 변한 건가 의아했는데, 이 작업을 하는 동안 서서히 변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장 깊게, 여러 번 했던 생각은 적당히 나이브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겠지만, 이 시리즈든 다른 작업이든 그게 작업이 아니든 뭐든 간에 더 이상 그런 태도로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시리즈를 소개할 기회와 함께, 지난 작업을 돌아보고 새 기획을 도모할 계기를 마련해주신 땡스북스 분들께 깊은 감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