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링 서비스가 끝나고 양해중 씨에게 다그쳐 묻고 싶었다. 그레이는 그림자가 50가지나 되는데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태어나 밥벌이하는 양해중 씨는 그림자가 왜 19가지밖에 없냐고 뒤에 0을 하나 빼먹은 게 아니냐고 양해중 씨와 주변 인물들에게 뿌리를 내리며 나 그거 뭔지 알아 공감하며 계속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그만큼 내 생활반경에 가깝게 밀착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주목하는 첫 번째 그림자_ 양해를 구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월드

제1화 경주의 앙금케이크는 예비 시댁에 상견례 가는 경주 씨의 초조함을 담고 있는 내용이지만 후반부에 예상 밖의 공포스러운 진실과 직면하게 된다.

경주는 종아리를 주무르며 생각했다. 양말, 똥값, 히스테리. 엄마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양말, 똥값, 히스테리. 지금 모은 돈이면 독립할 수 있을까. 양말, 똥값, 히스테리.

임소라 작가 특유의 위트와 난처함을 절묘하게 섞은 문장은 결혼적령기의 여성이라면 한 번쯤 만나는 장애물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양말은 결혼제도를 받아드렸을 때 떠안는 리스크를 상징하며 똥값은 결혼적령기가 지난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며 히스테리는 개인이 감당하기 버거운 현실을 뜻한다. 경주는 그 혼돈의 틈에서 답장을 보내지 않는 선택을 한다.

경주의 캐릭터를 투영한 나와 내 친구들이 생각났다. 주변 사람들 시선도 적당히 의식하고 휘둘리며 시댁에 잘 보이기 위해 애써서 앙금케이크를 주문하는 성의를 보인다. 승인이나 허락을 받아야 제대로 된 존재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노력하지만 위계 대상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일 때 경주는 비로소 모든 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왜 항상 여성들은 상대방에 비해 과하게 노력을 하게 될까? 그렇게 해야 당연히 살아남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잘 살아남았는가 질문을 던지게 한다. 5화 으뜸의 꽃다발, 8화 보경의 부적, 9화 미쁨의 마스크 역시 비슷한 맥락의 화두를 가지고 있다. 원치 않은 가족 구성원의 호러에 가까운 행동으로 인한 갈등 양상을 속도감 있는 스토리 전개로 빠르게 치고 간다.


📌주목하는 두 번째 그림자_ 낳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헌법 불일치 결정을 내린 지 1년이 지났지만 14주까지만 낙태허용이라는 정부의 법 개정 때문에 말이 많은 이 시기에 꽃님의 설문지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와 맞닿아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든 인간은 여성의 몸에서 태어난다. 여성이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뿐만 아니라 모든 책임을 떠안는 불평등한 구조에서 스스로 어려운 선택을 하고 과감히 터널 속으로 나오는 꽃님의 새로운 인생을 응원하고 싶다. 예진의 의자에 붉게 물든 자국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혼전임신을 환영받지 못하는 채영에게 냉동만두 말고 육즙 많은 딤섬을 사주고 싶다. 이제라도 효선의 입장을 이해하고 행동을 실행하는 필립의 어깨도 두들겨 주고 싶을 정도다. 무엇보다 계속해서 임소라가 이런 이야기를 쓰고 내가 읽는 이유는 낳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이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결정이 아니라 선택에서 자유로워질 때까지 많은 그림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주목하는 세 번째 그림자_ 천천히 찾아보자, 같이

태경의 파스를 읽고 어디선가 파스 냄새 풀풀 풍기며 열심히 일을 하는 여자를 떠올린다. 그건 나의 엄마이기도 하고 내 친구의 엄마이기도 하며 내게 잘해주던 이모님이나 아주머니들이기도 하다. 유정에게 가서 뭐라도 하자던 내현의 가족증명서 역시 먹먹함을 안겨주고도 충분했다. 다인과 해중이 혹시나 걸릴까 봐 조마조마하며 페인트 통을 같이 여는 심정으로 읽었다. 성희가 소파에 누워서 드디어 평안을 찾았고 사람보다 나은 쿠키는 뭉클했다. 임소라는 막연한 희망이나 지나치게 절박한 현실의 날것을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약자들의 연대의 끈을 팽팽히 당기는 데 집중한다. 짧은 호흡의 서사 안에서 노동문제, 학교폭력, 성차별, 가족폭력, 해외 원정 성매수, 남녀 애정 문제 등 쉽게 말하기 어려운 다양한 이야기들을 능청스럽지만 객관적인 거리를 확보하며 일정한 보폭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다. 뒷면을 살짝 들춰보면 우리 함께 바꿔보자고 강단 있는 목소리로 전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양해중의 19가지 그림자는 이어져야 한다. 이제 스무 번째 그림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어딘가를 향해 비추고 있는 빛이 있다는 것이니까. 부록 양해중의 일기를 보니 내가 아는 양해중이 맞는 것 같다. 히죽히죽 잘 웃지만 가끔 난처한 표정을 짓기도 하며 속은 다 알 수 없는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그냥 여자 사람 양해중 말이다.

시간은 흐르고 있고 사건은 일어나며 세상은 잠깐씩 진동한다. 이런 세상 속에서 내가 행복해지려면 일단 여자들이 숨통 트고 사는 게 먼저라는 명제가 따라붙을 수밖에 없다. 팩트 기사들이 이야기를 여는 시작점이지만 우리가 실제로 부딪치며 사는 세계는 훨씬 복잡 미묘하므로 하나씩 뜯어서 살펴보고 되짚어 보는 임소라 작가의 집요함에 박수를 보낸다.

 
🖇한줄평🖇 

📎팩트라고요? 소설입니다 소설이라고요? 팩트입니다 팩트도 소설도 아니라고요 우리가 처한 모습입니다.
📎여자들아 야망을 갖기 전에 양해를 구하는 착한 습관부터 버리자!
📎김지영은 이제 알 만큼 알았고 양해중을 알아야 할 시간이다.
📎임소라는 더 유명해져야 한다. 양해중이 그렇게 만들어줄 것 같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가벼운 크기의 양해중 읽고 나니 생각은 배로 많아지네요
📎귀여운 오동동체는 페이크야
📎공감은 둘째 치고 재밌다! 가독성이 좋다! 다 읽고 나면 더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