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때는 『언제나 양해를 구하는 양해중 씨의 19가지 그림자』를 읽기 시작한 명절 연휴. 나는 결혼 후 처음으로 추석 당일 밤을 혼자 보내게 됐다. 수년간 벼르고 벼른 라섹 수술을 결심하면서 귀성길을 피할 적당한 구실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각막 비대칭의 문제로 수술이 무산되고, 양가 부모로부터 어렵게 구한 양해가 헛수고로 돌아가나 싶은 그때 COVID-19가 또 다른 핑계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거듭된 양해로 얻은 자유의 밤, 남편은 먹고 남은 탕수육과 깐풍기를 챙겨 친구를 만나러 나섰다. 부모 없는 집에 홀로 남은 십대 시절의 어느날처럼 나는 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내내 가시방석이었다. 새벽 댓바람부터 차례상을 준비한 뒤 서둘러 일터로 향할 시어머니와, ‘형님’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달려 올 작은 어머니와 그의 장성한 두 딸, 몇 년 전 혼자의 삶을 선택한 엄마의 집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바람에. 양해를 구하는 마음과 양해하는 마음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동안 나는 돌연 화가 나고 슬퍼졌다가, 그럼에도 오직 나뿐인 시간을 더없이 기뻐하다가를 반복하며 미드 〈와이 우먼 킬〉을 정주행했다. 왠지 SNS에 무슨 말이든 쏟아내고 싶은 밤이었다. 물론 그러지 않았지만.


아니, 그런데 추천사를 써달랬더니 일기나 잔뜩 써놓고 말았다. 어쩔 수 없지. 양해로 얽히고설킨 세상의 수많은 양해중을 생각하다 보면 말이 많아질 수밖에 없으니까. 문득 궁금해진다. 만약 해중이라면 일기에 이날의 기억을 무어라 남겼을까. 적어도 자책과 원망의 넋두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애쓰는 마음, 헤아리려 애쓰는 마음에 가깝지 않았을까. 친구 정은의 갑작스러운 메시지에 기꺼이 응답한 그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