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X에게 큰돈이 생겼다는 소식을 접한 밤이었다. 돈의 규모와 출처에 대한 정보를 곱씹으며 오래 뒤척였다. 사돈적 복통이 이런 건가 싶을 만큼 명치가 뻐근한 게 제때에 잠들긴 글렀음을 예측할 때 휴대폰 화면이 다시 켜지면서 알림이 떴다. 벌떡 일어나 앉게 만든 메일 제목의 두 단어는 ‘UE100’과 ‘편집자’였다. 이 문단의 도입부를 쓰기 시작한 건 작년 11월이었는데 ‘뒤척였다.’의 앞 부분이 거의 1,000자에 육박했다. 전 남자친구들에 대해서는 ‘불만이면 어디 한번 따져보시든가?’라는 마음으로 그게 글이 되든 똥이 되든 신명 나게 싸질렀는데 전 남편에 대해서는 서술과 배설 모두 어려웠다. 헤어진 지 5년 혹은 10년 전인 관계의 기억들은 손으로 몇 개 쥐고서 주무를 수 있는 몽돌의 형태로 남은 반면, 남편의 전 남편화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 장갑이란 장갑은 다 찾아 겹겹이 끼고서도 피차 안 다치고 들어 올릴 방법을 못 찾겠는 날카로운 파편의 형태로 남아있기도 하고 혹시 모를 법적 공방에 대한 현실적 우려 같은 것들 덕분에 도입부가 약 1년에 걸쳐 두 문장으로 줄었다.


2.

다시 메일 얘기로 돌아와서, 전체 제목은 ‘언리미티드에디션 UE100) 프로그램 편집자(기자) 초청’이었고 발신인은 UE 기획팀의 남선우 큐레이터였다. UE100은 참가자들이 직접 나와 판매하는 부스가 아니라 시간마다 관람 인원이 한정된 전시 형태로 진행되며 프로그램 대신 뉴스레터(혹은 뉴스페이퍼)를 발행해 보려고 하는데 이 작업의 편집자(혹은 기자)로 참여를 제안한다는 내용이었다. 디자인은 양민영 디자이너가 맡았고, 나를 편집자로 추천했다는 것이다. 불도저 프레스를 운영하면서 쿨 매거진을 발행하고 옷정리라는 전시까지 기획한 그 사람이! 이 순간 사돈적 복통으로 짐작된 상복부 통증으로 인해 토퍼 위를 뒹굴었던 불과 3분 전의 일이 전생처럼 아스라해졌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믿겠는가. 믿거나 말거나! 정강이 수준으로 내리꽂혔던 나의 심리적 어깨는 한껏 치솟았고, 그것은 가히 관자놀이와 자웅을 겨룰만한 높이였다.

행사가 보름 남은 시점이었고,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회사에 아직 적응을 다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잠깐(정말이지 찰나라는 표현도 낭비일 만큼 잠깐이었다) 고민했으나 이걸 거절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보다 만약 내가 거절해서 다른 사람이 하게 된 결과물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는 순간 얼마나 빡칠까? 화병이 날 거야. 분을 못 이겨서 몇 없는 주변인들에게 폐를 끼치고 그마저도 전부 잃게 되어 사회적 관계망 내 그 어떤 연결도 이루어지지 않는 점으로 깜빡이다 소멸을 맞게 될 여생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이걸 안 한다고 해서 회사에 적응을 더 잘하게 될 것 같지도 않았고,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양민영 디자이너와의 협업이었다.

그리고 메일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당시 근무하던 회사에서 섭외 메일 작성과 발송 및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나?’하고 눈치를 보는 데에 개인 보유 역량의 90% 이상을 할애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깔끔하게 쓰인 메일과 그 발신인에게 굉장한 매력을 느꼈다.(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그런 메일을 받으면 어디서 나타난 귀인인가 싶다.) 메일을 이렇게 쓰는 사람은 어떻게 일하는지 알고 싶었다. 참여 의사를 밝히는 회신을 보내고 다음 날 줌으로 셋이서 첫 미팅을 했다. 두 번째, 세 번째 미팅 역시 줌이었고 양민영 디자이너와 둘이서 했다. 모든 미팅은 간결했다. 논의할 사항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끝내는 미팅이 가능하다니! 가능한 것이었다니! 내가 그동안 속했던 조직들에서 미팅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었던 무자비하면서도 불필요한 고통의 시간들은 다 뭐란 말인가!

내가 양민영 디자이너가 아니기 때문에 양민영 디자이너가 해당 작업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 말한다는 것이 여러모로 외람되지만 내 사이트니까 함부로 떠들어보자면, 양민영 디자이너는 우려되는 점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면서도 불평하지 않았고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최적의 결과물을 내놓았다. 이 땅엔 얼마나 징징이들이 많은가! 안 그래도 막막하고 진척이 없는 일에 동료랍시고 뻗대는 징징이들의 추태를 참아내느라 얼마나 많은 근로자들의 주먹이 울어왔냐는 말이다. 신은 마침내 이 사람을 만나게 된 순간에 느낄 기쁨을 환희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그동안 내 주변에 징징이 물량공세를 퍼부은 게 아닐까? 양민영 디자이너와의 협업은 그런 생각이 들게 했다. 4일 치 뉴스레터가 뚝딱 만들어졌다.




3.

전시 3일차였던 13일에 플랫폼엘을 방문했다. 관람객과 참가팀의 입장 대기 줄이 달랐다. 입장 속도가 좀 더 빠른 참가팀 쪽 대기 줄에 선 채 뭐랄까, 약간의 특권적 뽕 같은 것에 잠시 취했다가 그러고 있는 내가 제법 꼴 보기 싫어졌다. 이러려고 온 거야? 고작 이러려고? 이러면 좀 어때. 누굴 다치게 한 것도 아니고 나 혼자 생각한 거잖아. 속이 시끄러운 채로 전시장으로 입장했을 때 티켓을 확인하던 현장 스태프가 무척 친절했다. 은평구 신사동에서 강남구 논현동까지 이동하면서 쌓인 피로와 긴장을 녹이고도 남을 정도의 환대였다. 저울방(을 포함하여 이후 나오는 모든 방은 내가 임의로 부르는 것일 뿐 공식 명칭이 아니다.)과 회전 초밥방을 훑어본 뒤 상자방에서 장갑 나눔 이벤트를 조촐하게 열었다. 어떤 분들이 가져갔을까. 설마 아무도 안 가져가진 않았겠지? 전시가 다 끝나도록 장갑이 하나도 사라지지 않아서 스태프들에게 골치 아픈 폐기물로 남게 된 결말 같은 건 너무 슬픈데. 아니다. 남았다면 나에게 연락을 줬을 것 같다. 가져가라고. 그쪽이 더 슬펐을까.

마지막 키워드방에서 오래 머물렀다. 포춘쿠키가 그려진 대형 포스터 옆에 나란히 누워있는 뉴스레터를 누가누가 가져가나 유심히 지켜봤다. 안녕하세요? 지금 들고 계신 뉴스레터 상단에 제 이름이 인쇄되어 있답니다? 저는 사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본인보다 제 이름을 먼저 적어준 양민영 디자이너의 넓은 도량을 헤아리실 수 있겠어요? 뒷면을 참가팀들의 로고로 가득 채우면서도 동시에 포장지처럼 쓸 수 있게 만들다니 이 분을 가리킬 때 천재 말고 다른 단어를 찾으실 수 있겠어요? 고심 끝에 고른 몇 권의 책을 지하에서 결제하고 이로님과 인사를 나눴다. 정확하진 않지만 “전시가 조금 미뤄졌다면 ‘문이 많은 집’도 책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요?”와 비슷한 의미의 질문을 받았던 것 같다. 마침 난도질에 가까운 독자 리뷰를 받은 지 며칠 안 되었던 때라 “아뇨, 절대…”라고 웅얼거렸다. 어느 누구와의 대화든 연두부처럼 뚝뚝 끊기게 만드는 나 자신의 능력에 탄복하며 얼른 자리를 뜨려고 할 때였다. “선우님이 곧 내려오실 거예요.”

어떻게 하면 메일을 그렇게 깔끔히 쓸 수 있는지 물어보면 너무 난데없겠지? 이번만큼은 좀 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를 해보리라 거듭 다짐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남선우 큐레이터는 이번 작업에 참여해 줘서 고맙다고 말하며 파란 가방을 줬다. 제가 더 고맙다고, UE100에서 산 책은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 가방은 매일 같이 들고 있다고, 가볍고 활용도도 좋으면서 색까지 쨍해서 좋다고 말할 기회가 또 있을까. 지하에서 1층까지 함께 올라오는 동안 이렇다 할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가방이 이렇게 유용할 줄 알았다면, 선물 받은 기쁨이 이토록 오래갈 줄 알았다면 조용히 작별 인사를 나눴던 그 로비에서 어깨춤이라도 췄을 텐데. 내가 어떤 말을 꺼냈다면 더 좋았을까. 괜한 욕심에 설치다가 크게 실수하지 않은 걸로 다행인 건 아닐까. UE100 준비 및 진행 과정에서 느낀 바와 종료 이후에 대한 고민을 후기로 남겨야지 다짐하며 그 주말이, 또 일주일이, 한 달이, 1년이 흘렀다. 그사이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들어간 회사를 6개월 만에 그만뒀고, 각각 제주도와 코엑스에서 열렸던 두 번의 페어에 참여했고, 책을 더 찍으면 써야지 하면서 미리 접어둔 양해중의 덧싸개 천여 장을 재활용품 수거일에 내놨고, 열네 번째 언리밋에 신청하지 않았다.



4.

몇몇이 이유를 물었고, 그중 누군가는 “안이에요, 못이에요?”라고 덧붙였다. 뭐라고 대답했더라. 장례식장이어서 워낙 경황이 없었고,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기보다는 자신의 이미지를 예리하고 지적이면서도 유머를 겸비한 남성으로 설정하고 밀어붙이는 것으로 보여서 화제를 돌렸다. 안인지 못인지 세상에서 제일 궁금한 사람으로서 나름대로 추론을 해봤다. ‘미루어 생각하여 논함’이라는 추론의 사전적 정의에 합리적이라는 표현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밑밥으로 켜켜이 깔아둔다. 나는 뭔가 좋아지거나, 나를 뒤흔들 정도로 중요한 것 혹은 소중한 것이 생기면 그런 것이 생겼다는 사실 자체가 불안으로 작용해서 ‘그것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감각이 생겨야 비로소 안정을 찾는 사람인 것 같다. 두세 번의 연애나 가족과의 관계가 그랬고, 학교나 직장에서의 반복되는 불화 역시 주요 원인으로 앞 문장에 해당하는 나의 특성을 들어 설명하면 스스로 납득이 됐다. 관계의 불가피한 정도에 따라 어떤 관계는 망원경도 무용할 정도로 멀어졌고, 어떤 관계는 적정 거리를 확보해서 탈부착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내 생각에 UE도 그런 대상이 된 게 아닐까 싶다.


5.

언리밋에 신청했지만 떨어진 적이 있다. 2016년이었고, 일민미술관에서 3일 동안 열렸던 때인데 나는 당시 서울시청에서 사무보조 파트 타이머로 일했다. 이 얘기 어디서 쓴 것 같은데 어디였는지 기억나지 않으니 계속 쓰는 우를 범하기로 한다. 출퇴근 시 일민미술관을 반드시 지나야 하는 경로였는데, 버스가 광화문 광장을 지날 때면 미술관 건물보다 더 커 보이는 그 대형 포스터를 안 보려고 눈을 질끈 감았다. 행사가 열렸던 2박 3일 내내 몸살로 끙끙 앓았다. 이불을 동굴처럼 만들어 그 안에 웅크린 채로 이게 상사병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싶어 어이가 없었다. 그 이후로 매년 작업 계획을 언리밋 일정에 맞춰서 짰다.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삶. 스스로 정한 규칙을 비교적 문제없이 지켜온 것 같은데 왜 올해는 그게 안 될까. 질문이 계속되는 사이 계획은 무산되었고 일정은 정해진 길을 갔다. 인스타그램이 UE14 포스터를 알려줬다. 끔벅이는 눈. 감아야 되나? 여전히 감아야 되는 사람인지 자문하며 사이트를 구경했다. 소녀시대의 명곡 I got a boy는 A-yo GG로 대차게 포문을 연 후 이런 랩이 이어진다. 어머 얘 좀 봐라 얘 무슨 일이 있었길래 머릴 잘랐대 응 어머 또 얘 좀 보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타일이 바뀌었어 왜 그랬대 궁금해 죽겠네 왜 그랬대 말해 봐봐 좀. 참가팀과 프로그램 목록을 훑는 내내 수영과 유리의 목소리가 번갈아 귓전을 울렸다. 

관객의 입장으로 가는 건 처음이었다. 그동안 참가팀의 입장에서 UE를 즐겨왔다면 이번엔 관객으로 즐겨보자는 것, 이제는 몸살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이 된 것. 이 두 가지를 확인해 볼 작정으로 북서울미술관을 향했다. 이게 가을이지 소리가 절로 나오는 날이었다. 사이트에서 미리 점찍어둔 부스에 들러 몇 권의 책과 굿즈를 구매하고 프로그램룸에 자리를 잡았다. 행사 첫날에 득달같이 찾아온 데에는 첫 번째 프로그램이었던 ‘UE14의 모양들’을 듣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다. 너무 재밌어서 계속 듣고 싶었는데 막상 그런 자리에서 손들어 질문은 못 하는 사람이라 45분으로 끝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담아 혈액순환운동가처럼 호되게 박수를 쳤다. 두서없이 남긴 메모 몇 가지로 그날의 이야기를 되짚어본다.

  • 가장 빨리 사라지는 사이트 : UE14 웹사이트를 만든 오예슬 개발자의 말. 그동안 해온 작업 가운데 가장 빨리 사라지는 사이트였고, 그 특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이 많았다고.
  • 크게 터치 없어 멋진 : 박선경 디자이너의 말. 올해뿐만 아니라 지난 언리밋을 포괄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기획에 참여하는 여러 주체들이 서로 크게 터치하지 않는 덕분에 의외로 멋진 결과물이 나오기도 한다고.
  • 즐거운 가변성 : 박선경 디자이너의 말. 이것도 지난 언리밋을 포괄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는데, 기획자들은 물론 참가팀 역시 매해 바뀌기 때문에 그 ‘즐거운 가변성’을 아이덴티티에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 고민한다고.

사려고 했던 것은 얼추 다 산 것 같아(큰 착각이었다.) 이대로 집에 갈까 하다가 아까는 몇 곳을 들르기로 작정하고 돌았다면 이번에는 어느 부스에 멈추겠다는 계획 없이 무작정 돌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서너 시간을 머물면서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첫 번째는 참가자들이 부러웠다는 것. 관객으로 참여하는 언리밋도 즐겁고 반가운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나도 내년에는 책 더미 안쪽에 서서 즐거운 피로를 쌓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 마음이 들어 다행스러웠다. 두 번째는 그저 내 성격 탓 일 수도 있는데, 부스에 가까이 가서 작업물을 손에 쥐고 살펴보는 것은 물론이고 궁금한 점이나 느낀 바에 대해 직접 말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보다 두 번째가 나한테는 더 충격이었다. 안면이 있는 팀을 제외하고 그 어느 부스에도 말을 걸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작업을 하셨어요! 세상에 너무 좋다, 이런 색은 뭘로 뽑는 거예요? 이걸 하나하나 다 만드신 거예요? 말도 안 된다, 진짜 근데 어디서 타는 냄새 안 나요? 내 마음이 불타고 등등의 말을 겨우 “이거… 계좌이체…” 따위로 축약해놓고 손을 떠는 게 전부였다. 이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어? 기운이 다 빠진 채 축 늘어져있던 7호선 열차 안에서 내가 부스에 있을 때 들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중에 어떤 말들은 불가사의한 지경의 용기로 꺼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 고마웠다.



6.

지난주에는 상담을 시작했다. 상담을 처음으로 시도해 본 건 2018년 가을이었는데, 처음에 가서 왜 왔는지 묻는 말에 질질 울고 자기네 센터가 몇 주년이라서 잔뜩 할인 중이라는 각종 검사를 한 뒤 안 갔다. 다음 회차 상담료를 미리 결제해야 하는 곳이어서 두 번째 상담료까지 내고도 안 갔다. 검사 결과지는 반드시 방문으로만 찾아갈 수 있다고 세 번이나 전화를 줬는데도 안 갔다. 이번에도 또 그러면 안 될 텐데 걱정하면서 갔더니 확실히 좀 덜 울었다. 내게 약 60만 원의 선결제 후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떠나온 상담의 과거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마도 아는 바가 없을 선생님은 내게 목표를 잃은 것 같다고 했다. 같다고 했는지 잃었네요 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는지 기억이 불분명하다. 앞으로 같이 찾아보자고도 했다.

만사에 기운이 샘솟던 시절, 창고에서 매달 보내주는 정산서와 출고 내역서 뭉치를 요령껏 정리해 보고 싶어서 A4 크기의 파일을 샀다. 펼치면 양면으로 꽂을 수 있는 형태였는데, 정산서는 A4 출고 내역서는 A5라서 한 면의 절반이 비었다. 그게 그땐 너무 휑해서 꼭 채우고 싶었는지 예전에 학교 다닐 때 문방구에서 파일에 꽂아 쓸 수 있는 책철을 한 개씩 팔았던 기억이 나서 알파에 갔더니 아저씨가 언제 적 얘기를 하냐는 표정으로 3,000원 가격표가 붙은 상자를 꺼냈다. 50개 세트로만 팔더라고. 난 한 개만 있으면 되는데, 60원에 한 세트만 팔라고 하기도 좀 그래서 한 상자를 다 사 왔다. 덕분에 파일의 한 면에는 A4 정산서를, 나머지 한 면에는 A5 출고 내역서를 아래위로 나눠서 정리할 수 있게 됐다. 2020년 파일, 2021년 파일에 한 개씩 써서 책철 48개가 남았는데 더 이상 창고를 안 쓰게 되어서 정리할 뭉치도 없어졌다.

언리밋에 다녀오고 얼마 후 퍼블리셔스테이블에도 갔는데, 두 행사에서 사 온 것들을 뜯어보다가 문득 내년에는 그 책철 48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스타그램 새 게시물 공유 화면에서 48개만 제작되었으며 이번 행사에서 소진될 경우 추가 제작은 없을 예정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이모지를 고르는 데에 몇 시간째 공을 들이는 상상도 했다. 그렇게 상상만 초 단위로 하다가 거듭 무산될 수도 있다. 아니면 이 후기처럼 하루 이틀이면 될 줄 알았다가 1년이 넘어서야 끝낼 수도 있고. 일단은 무언가를 또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을 반갑게 맞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