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례지만 ‘비둘기’를 건너뛰고 오신 건 아닌지요? 제품명이 ‘비둘기와 모래시계’라고 해서 반드시 비둘기부터 풀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비둘기를 먼저 풀고 해답 페이지를 확인해보시면 이 페이지가 왜 이 지경인지 파악하시기 훨씬 수월하실 것으로 사료되는바, 아직 비둘기를 풀지 않으셨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 먼저 풀어보시는 방향을 적극적으로 추천드립니다. 평화의 상징 비둘기가 번잡한 마음에 안식을 가져다줄지도 모를 일이잖아요?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라면, 모래시계는 무엇의 상징일까요? 기다림, 혹은 영원히 도착하지 않을 윈도우의 응답일까요? 헤이(hay)라는 브랜드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나저나 왜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 되었는지 궁금하지만 왠지 길어질 것 같고, 슬쩍 찾아보니 출처가 믿음직스럽지도 않기 때문에 모래시계 페이지인 여기에 구태여 옮기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모래시계 하면 정동진이 떠오릅니다. 갑작스러운 말이지만 제가 요즘 수영을 배우고 있는데요, 선생님께서 평영 팔 동작을 가르쳐 주실 때 싸이의 데뷔곡을 아는지 물으셨습니다.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저를 보고 선생님이 “그러면 적어도 20대는 아니라는 건데!”라며 웃으셨고, 모래시계와 정동진을 연결 짓는 이 문단의 첫 번째 문장 역시 선생님을 웃게 할 것 같습니다. 왠지 선생님께서 이 글을 읽게 될 일은 없을 것 같지만요. 모래시계가 방영되던 당시의 시청 여부에 대해서는 가물가물하지만,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밤 할머니 댁에서 정동진으로 향하는 길을 꽉 채운 차들을 보면서 해 뜨기 전에 저 차들이 다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지 조마조마했던 것은 생생합니다. 이 페이지의 주인공은 모래시계라고, 그러니까 비둘기를 먼저 풀고 오길 좀 더 강력하게 회유하고 싶지만 모래시계에 대해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미 다 해버렸으니 이제 정답 풀이를 시작하겠습니다.
가로 1번은 [심달기]입니다. 단편 영화 ‘사람냄새 이효리’에서도 인상 깊었던 배우입니다. 심달기의 ‘달’에서 시작하는 세로 2번은 [달마중]입니다. 저는 늘 집에서 보름달이 가장 잘 보이는 방향으로 난 창문에 서서 소원을 빌었는데요, 다음에는 사전적 정의에 따라 산이나 들에 나가 볼까 합니다. 더 잘 이루어질지도 모르니까요. 가로 3번은 [토마토]입니다. 구한말에 쓰인 서양 조리법 도서에서는 토마토케첩을 ‘일년감장’이라고 소개했다니 그것도 참 귀엽지요. 세로 4번은 [마시멜로]입니다. 뜻풀이에 ‘구워 먹으면 더 맛있다고 한다.’라고 썼다가 지웠습니다. 먹어본 적이 없어서요. 세로 5번은 누구일까요? 저는 이 작가의 『풀잎은 노래한다』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재미라기보다는, 정말 몇 년 만에 밤을 새워 읽은 책이었어요. 『금색 공책』은 읽으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한 후 재시도를 노리는 중입니다. 이 작가는 누구일까요? 정답은 [도리스 레싱]입니다. 가로 6번은 [와중]입니다. 소용돌이 와(渦)자와 가운데 중(中)자로 이루어진 단어였네요, 저도 방금 알았습니다. 가로 7번은 [멜론]입니다. 세상에, 멜론도 카카오였군요? 저는 2018년부터 애플뮤직을 쓰다가 2021년쯤 스포티파이로 갈아탔는데요, 몇 달 전부터는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음악을 잘 안 듣게 된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멜론을 사용해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애플 전에는 지니를 썼고, 그전에는 벅스였네요. 싸이월드와 소리바다를 주로 이용하던 때도 있지만 이것 역시 수영 선생님께 웃음을 선사할 테니 그만하겠습니다.
가로 8번은 누구일까요? 제가 이 작가를 『일은 소설에 맡기고 휴가를 떠나요』라는 앤솔로지 덕분에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몇 년 지나서 단편집 『디어 라이프』를 읽었고, 또 몇 년 후에 『거지 소녀』라는 책을 선물 받았는데 아직 못 읽었습니다. 재미있을 게 분명한데 자꾸 미루게 되네요. 이 작가는 누구일까요! 정답은 [앨리스 먼로]입니다. 앨리스 먼로의 ‘앨’에서 시작하는 세로 8번은 [앨런의 규칙]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형태는 ‘앨런의 규칙’인데 구글에서 검색하면 ‘앨런의 법칙’이 더 정확한 형태라고 나오네요. 저도 모르는 단어였는데, 이 퍼즐을 만들면서 ‘앨’로 시작하는 다섯 글자가 또 없을까 하고 사전을 뒤지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가로 9번은 [바지런]입니다. ‘바지락’과 사이좋게 나란히 쓰고 싶네요. pants-run, pants-rock. 세로 10번은 [게르]입니다. 이 단어는 유튜브 채널 ‘공부왕찐천재 홍진경’에 올라온 영상을 보고 넣었습니다. 만두 수출을 위해 몽골을 다녀온 과정이 나오는데요, 제작진과 함께 게르에 모여 앉아 면세점에서 구매한 수정방을 마시면서 나누는 이야기가 정답고 뭉클했습니다. 다음날 숙취에 괴로워하다가도 영어로 발표를 준비하는 사업가적 면모에는 박수가 절로 나왔고요. 아직 안 보셨다면 꼭 보시기 바랍니다. 가로 11번은 [싱가포르]입니다. 저는 사실 드라마 ‘작은아씨들’에 나오는 몇 장면 말고는 싱가포르에 대해 가진 인상이랄 것이 없었는데요, 최근에 싱가포르를 방문한 지인이 SNS에 올린 사진을 보고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사진을 워낙 잘 찍는 분이셔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세로 12번은 [가가린]입니다. 아쉽게도 저는 종로에 있던 ‘가가린’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가야지, 가야지 하다가 영영 못 가게 된 곳이 너무 많아졌네요. 마지막으로 가로 13번은 [그린란드]입니다. 초등학생 때 어머니가 종이로 된 세계지도를 벽에 붙여주셨는데요, 이름은 예쁘지만 사람은 한 명도 살지 않는 땅일 거라고 상상했던 기억이 납니다. 5만 명이나 사는 땅인 줄은 오늘에야 알았네요.
두 장의 퍼즐을 함께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퍼즐 덕분에 저도 오랜만에 뭔가 만들면서 웃었습니다. 만든 것도 오랜만이고, 만들면서 웃은 것도 오랜만이었어요.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어려운 책을 읽다 보면 잠시 쉬어가고 싶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잠깐 환기를 도와주는 책갈피로 사용해주시면 더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모쪼록 끝과 처음의 사이에 정동진으로 향하는 7번 국도처럼 열정과 소망으로 빼곡한 한 해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